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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역사 교실 - 최흥원 신도비

입력 : 2014-12-10 11:04:00
수정 : 0000-00-00 00:00:00

 

직위가 정승에 이르렀어도 가난한 선비같아

 

선조의 명나라 망명을 막다

선조: “짐이 조선에서 갈 수 있는 곳은 모두 왜적도 갈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요동으로 가 망명을 하련다.”

최흥원: “불가합니다. 들어갔다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나이까?”

선조: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너갈 것이다.”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부산과 충주가 차례로 함락되자 평양으로 몽진 길에 나섰다. 그런데 한양마저 함락되고 평양까지 위태로워지자 평북 영변까지 피신하였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명나라로 망명하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이때 최흥원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망명을 만류하였다. 최흥원이 누구일까?

최흥원은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하는 것을 호종하여, 임진왜란이 끝난 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이라는 훈장까지 받았다. 그 과정에서 좌의정이 되었다가 류성룡이 파직됨에 따라 영의정까지 올랐다. 영의정이 된 뒤 선조가 명나라에 망명하려는 뜻을 내비치자 강력히 반대하여 포기시켰다.

 

청렴한 생활... 사람을 진정성있게 대하였고

최흥원은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청렴한 생활을 했다. 지방관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굶주린 백성을 구하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큰 신망을 얻었고, 임진왜란이라는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선조를 보필하여 공을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에 대한 평가가 실려 있다.  

“흥원은 천성이 어질고 후덕하며 일처리가 크고 의연했다. 외직이나 내직이나. 큰소리로 호령하지 않아도 가는 곳마다 잘 다스렸다. 직위가 정승에 이르렀어도 처신하는 것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집에 거처할 때에도 검소하여 먹고 입는 것이 간소하였다. 사람을 진정성 있게 대하였고 친척에게는 더욱 돈독하게 대하였다. 평소에 말을 빨리 하지 않았고 안색이 변하지 않아서 자식들도 그가 기뻐하거나 화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선조에게 백비 받았으나 후손이 글자새겨 아쉬워 

선조는 최흥원이 죽은 뒤 얼마 안 있어 그를 염근리(廉謹吏)로 선발하였다. 염근리는 청백리의 또 다른 말로 청렴하고 조심성 있는 관리를 뜻한다. 

 “최흥원의 청빈한 삶을 글로써 찬양하는 것은 누가 될 수 있도다. 그에게 백비를 내려 묘소 앞에 세우게 하라.”

칭찬하는 말조차 그의 청빈한 삶에 누가 될까 싶어서 선조가 그에게 백비(白碑)를 내려준 것이다. 백비는 말 그대로 아무런 글을 쓰지 않은 깨끗한 비석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묘소가 있던 파주 아동동에 백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백비가 땅속에 묻히게 되었고, 1987년에 이르러서야 발견되었다. 현대의 후손들은 그의 업적과 청빈한 삶을 기리기 위해 백비에 글자를 새겼지만, 선조가 하사한 백비를 그대로 보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고의 관직에 오른 이가 가난한 선비처럼 검소하게 살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그 옛날부터 ‘청백리’라는 훈장을 내려주는 풍습이 생긴 것이다. 현재 최흥원의 묘는 파주시청 뒤쪽에 있는 군부대 안에 있다. 묘소에 참배하려면 군부대와 협의해야 한다. 최흥원의 묘 아래에는 그의 아들 최산립의 묘가 있는데, 그 역시 부친을 닮아 청빈하게 살았으며 청백리에 선발되었다. 

 

정헌호 (역사교육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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